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7. 7世 〉6. <부정공>첨추공영당기(僉樞公影堂記)
1. 문헌 목록 〉7. 7世 〉8. <부정공>통훈대부정읍현감공가상(通訓大夫井邑縣監公家狀)
1. 문헌 목록 > 7. 7世 >  
7.<부정공>통훈대부정읍현감공묘갈명(通訓大夫井邑縣監公墓碣銘)
通訓大夫井邑縣監公墓碣銘 公諱智崑姓趙氏系出淳昌 高麗門下侍中諱璋后也高祖諱佺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曾祖諱元吉號農隱與圃牧陶冶齊名時稱五隱官典工判書玉川府院君諡忠獻享武夷院祖諱瑜號虔谷官副正行通喪制守罔僕義即杜門洞七十二賢之一也入我 朝表宅建祠考諱斯文官司正 贈吏曹參議妣贈淑夫人靑山鄭氏參軍尚周女公生而質美幼若成人及長文學行誼蔚有重望 成宗癸巳筮仕補宣敎郎遷司憲府監察階通訓實心奉公僚友動色秉銓者將欲不次擢用公牢拒曰吾所未信不敢躁進且爲親祿仕義當辭尊居卑也乞養爲井邑縣監居官蒞民廉潔無私以興學養士爲先務修庠序儲書籍勸勉鄉子弟以爲學之方至於廨宇樓觀之繕葺亦不費民力而一新之孫承宜此長記其蹟詳焉及歸鄉人立石而頌德事見輿地勝覽自是無復仕進意專心養親極其孝敬兄弟四人友愛尤篤大被長枕埍唱箎和至今謙川上有亭名相好者即其遺蠋也癸卯丁内艱居喪執禮情文靡缺以 弘治乙卯十月十三日考終于寝距其生宣德庚戌壽六十六葬南原水旨坊馬淵村後壬坐原配令人南原梁氏參判敬走女生與公同年婦道甚備宗族咸稱成化丙申十二月十九日卒享年四十七墓雙封三男長穆郡守次和司直次稹一女生員金召奭郡守一男善種宣敎郎七女柳孟權河自壽金琛梁壽長李敷宋廷彦李纘司直三男藎臣承義副尉純臣參奉介臣監察五女忠順衛梁應茂忠義衛柳昌祖晋碩佐金黙忠義衛柳浚稹一男善弼善種无育藎臣二男貞老德老並參奉純臣一男期老參奉介臣二男大承縣監大胤早歿玄孫以下煩不盡錄而後有奉事瑋奉事珏進士儻以忠孝學行著莫非公積累之餘蔭也嗚呼公篤生於屢世忠讜之門時値昇平才優經濟而常懷安分知足之戒要津捷徑所性不存故卒沉下僚薄試牛刀而旋又勇退以終天年盖亦懲 於其叔父節愍公父子丙子之禍而不欲其與世推移也飛不盡翰固爲識者所恨然在家而敦孝悌之行牧民而有循良之風至今爲四百餘年之久而令聞猶傳不亦賢乎後孫元采玟采泰根昌周洪根等方營墓石使門秀士炳寬謁文於不佞不佞固辭不獲謹叙次如右系之以銘曰玉川故家世篤忠貞公承祖武夙有令名惟孝友于實由天性是爲仁本可推百行位不克顯於公何關惟有聲績誦傳楚山解紱歸來任便捷遲鍾鳴夜行彼何人斯餘蔭攸暨後嗣熾昌我銘貞石用示旡彊 月城 崔永祚 撰 參奉雲齋 통운대부정읍현감공묘갈명(通訓大夫井邑縣監公墓碣銘) 공의 휘는 지곤(智崑), 성은 조씨이니 순창이 본관이며, 고려 문하시중 휘 장(璋)의 후손이다. 고조 휘 전(佺)은 대광보국광록대부(大匡輔國光祿大夫)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요, 증조 휘 원길(元吉)은 호가 농은인데 포은 목은 도은 야은과 함께 이름이 나타나서 당시 사람들이 오은(五隱)이라 불렀다. 시호는 충헌이며 무이원(武夷院)에 향사한다. 조(祖) 휘 유(瑜)는 호가 건곡이요, 벼슬이 부정(副正)인데 상제(喪制)를 지키고 절의를 세웠으니 즉 두문동(杜門洞) 七十二현(賢)의 한 분이다. 조선에 들어와 정려를 내리고 사우를 세웠다. 아버지의 휘 사문(斯文)은 사정(司正)을 지내고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비 증숙부인(贈淑夫人) 청산정씨(靑山鄭氏)는 참군(參軍) 상주(尚周)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아름다왔는데 어린 나이에도 어른스러웠다. 자라서는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뛰어나 여러 사람의 총망을 받았다. 성종 계사년(一四七三)에 벼슬을 시작하여 선교랑(宣敎郎)에 보임되고 다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어 품계가 통훈대부가 되었다. 공은 성심껏 공무를 수행하니 동료들이 얼굴 빛을 바꾸었고, 전형(銓衡)을 맡은 사람이 잧아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해 임용하려 하였지만 공은 굳게 고집하면서,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니 감히 앞지를 생각이 없다. 또 어버이를 위해서 하는 벼슬이니만큼 의리로 보아 마땅히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있고 싶다』 하고는 부모 봉양을 위해 정읍 현감을 자원하여 나갔다. 고을에서 백성을 다스릴 때는 청렴결백하고 사(私)를 두지 않았으며, 학교를 세워 선비를 가르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다. 그래서 향교를 수리하고 책을 비치하여 고을 자제들에게 학업을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심지어는 관아의 청사와 누대(樓臺)를 수선하는데도 백성들 힘을 빌지 않고 새롭게 하였다. 그러자 승지 승선(承宣) 손비장(孫此長)이 공의 치적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돌아오자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는데 이런 일은 「여지승람」에 보인다. 이때부터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 전심으로 어버이를 봉양하여 효도와 공경을 다하였다. 四형제의 우애가 돈독하여 큰 이불과 큰 베개를 만들어 함께 자면서 화락하게 지냈는데 지금 겸천 위에 있는 상호정(相好亭)이 그 유적이다. 계묘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상례를 조금도 어기지 않고 치루었는데 홍치(弘治)을 묘년 十월十三일 정침(正寝)에서 고종명하였으니 선덕(宣德) 경술년에 태어나서 六十六세를 누린 것이다. 남원군 수지면(水旨面) 마연(馬淵) 뒷산 임좌(壬坐)언덕에 장사하였다. 배(配) 영인(令人)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참판 경로(敬老)의 따님인데 공과 동갑이다. 부덕을 다 갖추어 일가들이 모두 칭찬하였는데 성화(成化) 병신년(一四七六) 十二월 十九일 졸하니 향년 四十七세였으며 쌍봉(雙封)이다. 아들은 셋인데 큰 아들 목(穆)은 군수요, 다음 화(和)는 사직이요, 다음은 진(稹)이 다. 딸 하나는 생원 김소석(金召奭)에게 출가하였다. 군수는 아들 하나인데 선교랑(宣敎郎) 선종(善種)이요, 딸 일곱은 유맹권(柳孟權)·하자수(河自壽)·김침(金琛)·양수장(梁壽長)·이부(李敷)·송정언(宋廷彥)·이찬(李纘)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사직은 三남인데 신신(藎臣)은 승의부위(承義副尉)요, 순신(純臣)은 참봉이요, 개신(介臣)은 감찰(監察)이다. 딸 다섯은 충순위(忠順衛) 양응무(梁應茂), 충의위(忠義衛) 유창조(柳昌祖), 진석좌(晋硕佐), 김묵(金黙), 충의위 유준(柳浚)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진(稹)의 아들은 선필(善弼)이며, 선종은 후사가 없다. 신신은 아들 둘인데 정로(貞老) 덕로德差)로 모두 참봉이다. 순신의 一남 기노(期老)는 참봉이요, 개신의 아들은 둘인데 대승(大承)은 현감이요 대윤(大胤)은 일찍 죽었다. 현손 이하는 번거로와 다 적지 못한데, 그 후에 봉사(奉事) 위(瑋), 봉사 각(珏), 진사(進士) 당(儻)이 충효와 학행으로 이름난 것은 모두 공이 여러가지 쌓은 음덕이다. 아! 공은 여러 대 충성스러운 집에서 태어나 태평한 세대를 만났으며 재주가 세상을 다스리고도 남았는데 분수와 만족을 알아서 벼슬에 오를 수 있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성품에 맞지 않아 마침내 낮은 벼슬로 졸하였으니, 소 잡는 큰 칼을 닭 잡는데 잠깐 썼을 뿐 용퇴하여 천수를 누렸다. 이는 대체로 그의 숙부 절민공 부자가 병자년의 화를 당한 것을 경계하여 세상의 추이(推移)에 참여하지 않고자 한 것이다. 품은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식자들은 한스럽게 여기지만 집에 있으면서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하였고, 백성을 다스릴 때는 훌륭한 관리의 풍도가 있어 지금 四백여 년이 지나도록 아름다운 이름이 전해오고 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후손 원채(元采)·민채(玟采)·태근(泰根)·창주(昌周)·홍근(洪根) 등이 바야흐로 묘석을 세우면서 집안의 수사(秀士) 병관(炳寬)을 시켜 나에게 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감당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이상과 같이 적고 이렇게 명(銘)한다. 옥천의 오랜 집안 玉川故家 대대로 충성했네 世篤忠貞 공은 조상의 무를 이어 公承祖武 아름다운 이름 떨쳤네 夙有令名 그 효도와 우애 惟孝友于 실로 천성이었네 實由天性 이것이 인의 근본으로 是爲仁本 백행을 짐작케 하네 可推百行 벼슬 높지 못한 것 位不克顯 공에게 무슨 상관이랴 於公何關 오직 훌륭한 치적만이 惟有聲績 초산에 전하네 誦傳楚山 벼슬 버리고 돌아와 解紱歸來 마음 편히 지내니 任便樓遲 종소리 들리는 밤 鍾鳴夜行 저기 가는 이 누구인가 彼何人斯 음덕이 남아서 餘蔭攸曁 후손이 번창하네 後嗣熾昌 내가 비석에 명 써서 我銘貞石 영원토록 전하네 用示无彊 월성(月城) 최영조(崔永祚) 지음 벼슬은 참봉 호는 운재(雲齋)이다
 
1. 문헌 목록 〉7. 7世 〉6. <부정공>첨추공영당기(僉樞公影堂記)
1. 문헌 목록 〉7. 7世 〉8. <부정공>통훈대부정읍현감공가상(通訓大夫井邑縣監公家狀)